튀니스에서 담아온 나의 인생, 사진
밤비행이 좋아 | 2019-08-13 08:58:44



튀니스의 하얀집 그리고 파란문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루> 속 바로 그 곳이야


학에서 불어를 전공했다. 어디 가서 불어한다고 말하기 창피한 수준인데 그래도 ‘나 불어한다’고 꼬박꼬박 어필하고 다닌다잘난 척이라기보다는 불어에 대한 나의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3학년 때 무리하게 전과까지 하면서 불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함과 동시에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불어는 좋아하는 만큼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전필이 어려워 어떻게든 학점을 따려고 선택과목으로 프랑스어권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프랑코포니(불어권) 영화를 굉장히 자주 다뤄 매 수업이 즐거웠었다. 그중 <아주르와 아스마르>라는 미셸 오슬로 감독의 영화는 아랍문화권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내 인생 첫 프랑스 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감독으로 나에게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알게 해 준 분이다. 2000년도에 국내에서 개봉한 프랑스 그림자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2D인 데다가 흑백에 가까운 그림자 애니메이션이었음에도 10살 어린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마 이때부터 프랑스어와 문화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아주르와 아스마르> 역시 2D 애니메이션임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이국적인 배경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세세한 묘사, 아랍문화권이라는 생소한 소재와 신화적인 스토리를 활용한 내용 전개. 보여주기식이 아닌 교훈을 담고 있는 내용. 무엇보다 새하얀 건물과 대조되는 파란 창문의 집들이 즐비한 영화 속 세계를 보고 저런 곳이 실제로 있는 걸까 영화를 보는 내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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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 비행을 가게 되었다. 주변에 뭐 볼 게 있을까 싶어 호텔 위치를 구글 창에 입력한 순간 그토록 좋아했던 ‘아주르와 아스마르’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얀 건물, 파란 창문, 쾌청한 날씨. 언뜻 보면 산토리니와 닮았지만 분명히 다른 곳. 튀니스였다.

튀니지는 불어권으로 과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불어가 공용어이며 수도 곳곳에 프랑스 문화적 색채가 묻어난다.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 한 번 밟아보는구나 싶었던 마음에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분명히 더울 거란 생각에 나풀거리는 얇은 여름 소재의 옷을 수트케이스에 던져 넣고 호텔 수영장도 가보자 싶어 수영복이랑 선글라스도 야무지게 챙겨 넣었다. 튀지니의 4월 날씨는 낮에는 평균 17도 저녁에는 9도까지 떨어지는, 이제 막 겨울이 끝난 쌀쌀한 시즌으로 수영장은 어림도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더울 거라 지레짐작으로 얇은 옷만 잔뜩 챙겨 같이 비행한 크루에게 가디건 한 장 빌려 입고 나서야 호텔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낮 동안은 해가 쨍쨍해서 춥다고 못 느끼는데 해가 지면 다운점퍼가 절실해진다. 참고로 7, 8월 튀니스의 날씨는 무더운 여름이므로 4월에 챙겼던 슈트케이스를 그대로 가져가면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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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 전통시장 souk로 향했다. 적도에 가까울수록 구름이 낮게 뜨는 걸까? 손에 닿을 듯한 구름이 머리 위 파란 하늘 속에 동동 떠있었다. 약간은 쌀쌀하지만 춥다고 웅크릴 정도는 아니었다. 10분 정도 달렸을까?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전통시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너희 옷 사려고 그러지? 여기가 완전 오피셜한 곳이야. 
다른 곳은 다 메이드 인 타일랜드나 차이나라서 질이 안 좋아."

, 이게 말로만 듣던 택시 기사와 상점가 간의 안 보이는 거래와 커미션의 현장인 건가. 
변태 기질이 다분한 나는 말로만 듣던 상황을 접하자 갑자기 신이 났다.

"우리는 옷 사려는 게 아니라 튀니스 문화를 보고 싶어. 그래서 전통시장 souk에 가려는 거야."
"거기는 완전 다운타운이야. 여기서 한 30분 걸리는걸. 그리고 여기가 질이 더 좋은데?"

"옷은 필요 없고 그냥 마켓에 가고 싶은 거야. 거기로 가자."
"그럼 100TDN(튀니지안디날)에 시장까지 가고 다시 여기로 오는 거까지! 어때?'"

나이 들면서 늘어나는 건 능청스러움이다. 자, 흥정을 시작해 볼까?

"내 친구가 튀니지 앤 데 튀니지 택시 되게 싸다고 그랬어. 내가 구글링해도 10TDN 이면 어디든 간다던데 그니까 60TDN 하루 대절하자."
"안돼! 시내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시디 부 사이드(Sidi Bou Said)까지 와서 너희 기다렸다가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건데? 90!" 
"니 내 튀니지안 친구가 말이야 (어쩌고 저쩌고). 우리 사실 환전도 안 했어 그러니까 70!"
"90!" 
"그럼 80! 할라스(Halas)"
"그래 할라스! 80"

*할라스(Halas): 끝!(done)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결정을 내릴 때 아니, 말 끝마다 붙인다.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어찌어찌 80TDN으로 낙찰! 깎았음에도 속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바로 시내로 향했다. 신기할 정도로 잘 닦인 깨끗한 도로, 정확한 신호체계와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는 4차선 도로. 양옆으로 무역선이 대기 중인 신기한 곳. 정말 모든 게 신기했다.

흔히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국가들을 전부 아프리카로 통칭해서 부르곤 한다. 문화도 종교도 기후도 다 무시해버리고 다 비슷비슷하겠거니 자의적으로 생각해버린다. 나는 아니라고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짐 챙긴 걸 보면 괜히 잰척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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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시장 souq 앞 광장에 위치한 분수대

20분 정도 달려서 시내에 들어갔다.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곳이라 유럽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알고 보니 거리 이름이 샹젤리제 거리란다. 로터리 한가운데 자리 잡은 빅벤과 때때로 지나가는 초록색 트램. 길거리에 늘어선 꽃 파는 마차를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 바르셀로나 광장. 작은 유럽이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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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마다 매력이 터져 나오는 튀니스의 전통 시장

꽃마차 뒤로 크고 작은 카페가 주욱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유럽을 닮은 듯 또 다른, 자유롭고 느긋함이 풍기는 곳이었다. 아랍권이라 도하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니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넘치는 활기에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낮은 건물에 더욱 정감이 가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인종에 놀라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걷는데 주변에서 "니하오"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심지어 지나가던 외국인 관광객은 "칭챙총"이라고 웃으면서 지나가더라. 나도 안다. 눈 작고, 코 낮고, 체구도 왜소한 거. 못 배워 저런 말을 지껄이는구나 넘어갈 수 있는데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물어보는 사람들에 둘러싸이니 속상하고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Je suis coreenne(나 한국인이야)."를 외치며 상점 주인들과 안면을 트고 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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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권의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각종 작품들. 파란 문을 열면 거울이 나온다.

전통시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 30분이면 둘러본다. 다만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딱히 뭘 산다기보다 화려한 색깔과 특이한 모양의 장신구 등을 구경하러 가기 좋은 곳이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튀니스 문화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결혼을 안 했다면 제 아들을 싼값에 데려가라며 자석 가게 아저씨가 쿨하게 제안했다. 바로 옆 가게를 운영하는 게 자기 아들이란다. 맞은편 역시 본인의 가게! 가족 경영인가 봐. 아들을 얼마에 넘길 수 있겠냐는 나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리며 연신 "안 비싸(Pas cher)!"를 외쳐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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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크렘

느긋한 모드로 바뀌어 광장에 앉아있어도 카페에 가도 혹은 계속 산책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Souk에서 벗어나 샹젤리제 거리 초입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라떼를 마시고 싶어 café crème을 주문했다. 부드러운 크림이 두껍게 올라간 진한 커피! 2.40TDN으로 1디날에 약 500원인 걸 감안하면 1300원 정도 하는 굉장히 저렴한 가격이다.

길거리에서 마시는 카페라떼. 코코아 파우더가 올라간 부드러운 크림층을 수저로 야금야금 퍼먹다가 이내 커피와 함께 마셔봤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crème은 설탕이 안 들어갔음에도 달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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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니스 전통 도넛으로 바삭하게 튀긴 반죽에 설탕을 듬뿍 발라 준다.

길거리에 팔자 좋게 늘어져있는 고양이처럼 한동안 멍하니 햇살을 쪼이며 카페에 앉아 있었다. 활기 넘치면서도 여유로운 튀니스는 내 상상 속 튀니스와 전혀 달라 당황스러우면서도 뜻밖의 행운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시디 부 사이드 (sidi bou said)
어디서 찍든 인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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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집과 파란 문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지 건물은 하얀색, 창문과 문은 전부 파란색이었다. 멀리서 보면 산토리니를 연상케하는 작은 마을인데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곳만의 향기가 풍겨온다.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르> 속 시장 씬에서 보았던 화려한 그림 장식, 아랍 문화가 풍겨나는 그림, 장신구, 옷 등 이곳만의 문화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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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으로 가득 찬 메인 오르막길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길로 접어든 순간 세상과 차단된 듯 고요해졌다. 종종 지저귀는 새소리를 제외하고 나와 살랑이는 바람뿐이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마다 인생 스폿이라 똥 손인 나조차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연신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시디 부 사이드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치 서울의 북촌 한옥 마을같이 관광지가 된 거주 지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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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문화권은 나에게 신비함 그 자체였다. 서양인들이 오리엔탈 동양문화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종종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통해 바라보듯이 나에게 아랍문화는 항상 절제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며 화려함을 넘어선 촌스러움으로 요약되는 곳이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내 예상과 같고,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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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문화는 아름답다. 직접 경험하기 전에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고정관념은 언제나 옳은 판단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된다. 우물 안에 갇혀 있던 내가 비행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많을 것을 보게 되었다.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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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 발레인의 흔한 컨셉 사진

누군가의 집 옥상일지도 모를 전망 좋은 곳에 올라서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공허함이 밀려왔다. 해지는 튀니스의 하늘은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흰 건물에 반사된 반짝이는 노란빛과 석양빛에 묻혀버린 파란 창문까지. 나조차도 석양 속에 먹혀들어 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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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본 <아주르와 아스마르>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에 묘한 느낌이 들면서 마냥 열정 넘치던 대학생활이 스쳐갔다. 물론 여전히 불어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지만 그래도 놓지 않고 있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봤다.

그래, 전과하길 잘했어. 덕분에 지금 튀니스에 와서 인생 사진도 남기게 되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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