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북극 탐험가, 핀란드 케미의 쇄빙선
테라노바 | 2019-12-25 09:30:00

쇄빙선, 말 그대로 얼음을 깨는 배다.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실제로 접할 일은 사실상 없다. 보통은 극지방 연구선 등에서나 쓰이는 특수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특별한 케이스로 러시아의 대형 쇄빙선을 타고 북극해를 항해하여 북극점을 찍고 근처의 섬들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초호화 럭셔리 패키지여행이 있긴 하다.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2주간의 여행 기간 1인당 경비는 자그마치 3,000만 원에 달한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유일의 대중적(?)인 쇄빙선 투어의 출항지가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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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생소한 케미(Kemi)에는 일반인이 탈 수 있는 관광용 쇄빙선이 있다. 산타마을로 유명한 로바니에미(Rovaniemi)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였다. 비용도 아주 저렴(?) 하고, 무엇보다도 4월 중순까지도 쇄빙선 크루즈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약 700km 떨어진 이곳은 모든 것이 눈에 덮이고 얼어붙은 그야말로 겨울 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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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맑은 겨울 아침, 케미 남쪽 아요스 항에 정박하고 있는 쇄빙선에 올랐다. 쇄빙선이라 뭔가 다를까 싶었지만 겉으로 봐서는 보통의 배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정박한 배 주변을 얼음조각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만 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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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절정이 지나서인지 의외로 춥지는 않았지만 몸이 날아갈 듯 바람이 불었다. 승선 후 내다본 항구 풍경이 어딘가 생소했다. 바닷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음이 완전히 뒤덮은 바다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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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는 4시간이라고 했다. 출발 직후 승무원은 브리지, 기관실, 승무원실뿐 아니라 구석구석의 편의 시설까지 데리고 다니며 배에 대해 설명했다. 이 배의 역사부터 이곳의 투어가 생겨나게 된 사연, 그리고 쇄빙선이 얼음을 깨는 원리 등.

다 좋았는데 아쉬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면 마지막 귀띔이었다. "오늘 항해는 이곳 보트니아(Gulf of Bothnia)만의 해안 근처에서만 도는 것입니다." 투어 유람선이 먼바다를 갈 일은 만무할 테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며 탐험선의 기분을 느낄 수도 있었을 텐데 뭐 굳이 그런 '팩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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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빙선에 대한 간단한 투어와 소개가 끝나자 우리는 갑판으로 올라왔다. 배는 어느새 항구를 벗어나 항해 중이었다. 배 주변은 온통 크고 작은 얼음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여전히 바닷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배가 새로운 얼음 지대를 깨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배들이 이미 지나다녀 얼음이 깨져 있는 구간을 지나는 중이었다. 어쨌든 이미 그 분위기는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장관이었다. 배가 나아갈 때 배 주변에 물보라가 아닌 얼음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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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방송에서는 쇄빙선이 얼음을 깨겠다고 했다. 모두들 배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하얀 빙판 앞으로 배가 나아가자 얼음판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언뜻 그 모습이 펜으로 까만 선을 긋는 듯했다. 갈라진 얼음판은 더 작은 얼음조각으로 쪼개졌다. 배가 지날 때마다 두꺼운 얼음판들이 뒤집어지는 모습은 묘한 쾌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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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울 때는 기온이 영하 30℃까지 내려가는데, 1999년 기록은 무려 영하 51.5℃였다고. 이곳 보트니아만은 수심이 얕은 데다가, 염도도 다른 곳에 비해 크게 낮아서, 그냥 마실 수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바다임에도 최소 45~100cm 두께로 얼기 때문에 그 위로 자동차도 다닐 수 있단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겨울이 되면 모든 항구가 얼어붙는 나라다. 가뜩이나 겨울도 긴데 바다가 계속 얼어있으면 경제활동은 마비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쇄빙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는 새로운 쇄빙선을 본격적으로 건조했다. 이때 활약한 것이 1950년대 말 건조된 카르후급(Karhu Class)의 쇄빙선, 그중에서도 1961년부터 취역한 삼포(Sampo) 쇄빙선이다.

쇄빙선은 화물선들이 항해할 수 있도록 얼음을 깨서 길을 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등장한 최신 화물선들은 크기가 점차 커져 앞에서 길을 내는 쇄빙선 역시 더 커져야만 했고 기존 쇄빙선들은 모두 퇴역해야 했다. 1986년 한 척은 폐기되고, 한 척은 소련에 팔렸다. 남은 한 척의 삼포는 케미 시에서 사들였고, 관광용 크루즈선으로 부활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쇄빙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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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빙선의 원리는 단순했다. 선체가 얼음판 위를 살짝 타고 올라가서 배의 무게로 얼음을 깨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체의 앞부분은 일반 선박보다 훨씬 두껍고 무겁게 만든다.

이때 얼음이 깨지지 않으면 배가 좌초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경우 배는 다시 후진을 한 후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 때문에 요즘 쇄빙선들은 전통적인 엔진보다는 전후로의 기동에 대한 전환 조작이 용이한 전기모터로 추진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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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쇄빙선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잠시 후 기중기를 이용해 트랩이 내려졌다. 바다 한가운데서 하선이라는 묘한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눈을 번뜩이며 선미로 몰려들었다. 트랩이 내려지자 승객들은 신나서 내리고, 승무원들은 얼음 위에서 벌어질 이벤트 준비에 바빴다.

마침내 ‘바다’ 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온이 그렇게 낮지 않아 곳곳에 눈이 살짝 녹아 있어서 발이 푹푹 빠지는 곳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얼음 위에 내려 쌓인 눈이 물러진 것일 뿐 얼음 자체가 녹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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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오르락내리락하며 이 멋진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편 배 뒤편에서는 승무원들이 쇄빙선에서나 가능한 깜짝 이벤트를 마련했다. 바로 극지 바다수영이었다. 말만 수영이고 사실은 그저 물 위에 뛰어들어 떠 있는 이벤트였다.

맨몸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드라이 슈트(Dry Suit)를 입고 깨진 얼음 사이의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인데, 저절로 몸이 물에 뜨는 것이라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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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까지 바다가 얼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설명에 의하면 한 번 두껍게 언 얼음은 어지간히 기온이 올라도 쉽게 녹지 않는다고. 덕분에 보기보다 춥지 않은 적당한 기온, 맑은 날씨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제 항구로 돌아간다는 방송이 나왔다. 더 할 것 없을 정도로 오래 머물렀음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 또 이렇게 바다 위를 달려볼 수 있을까? 



[INFORMATION - 쇄빙선]


케미에서 약 10km 떨어진 아요스(Ajos)항에서 출발한다. 

크루즈 시간은 3시간, 4시간 중 선택할 수 있고 4시간 크루즈에는 점심 뷔페가 포함된다. 

가이드 안내의 쇄빙선 내부 투어, 얼음바다 수영 이벤트 포함.


| 이용요금 | 3시간 크루즈 300Eur, 4시간 크루즈 450Eur (어린이는 50% 할인)  

| 홈페이지 | www.experience365.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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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 낯선 문화에 던져지는 것을 즐기는 타고난 여행가. 여행 매거진 트래비와 여행신문사의 객원기자로도 활동 중. 여행하며 발생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트래비와 일본 출판사 소학관의 웹진 @DIME에 연재 중. post.naver.com/oxenho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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